한·일 목욕문화 ‘벗겨보기’

동래에서 금강산까지 직접 방문
고려에서 근대한국까지 ‘온천탕’ 통한 역사 되돌아보고
조선인과 왜인, 반도신민과 일본인
목욕풍속과 만남 되짚어봐
온천도 좋고 대중목욕탕도 좋다. 목욕은 분명 공감각적 체험이다. 탕 입구를 밀고 들어갈 때 눈앞에 닥쳐오는 자욱한 증기, 부자가 또 모녀가 서로 등을 밀어주며 도란도란 주고받는 정담, 쏟아지는 물줄기와 첨벙거리는 물장구, 아득한 물비린내와 새큼한 이끼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있다. 하지만 욕탕이란 단어에서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몸에 대한 기억이다. 손끝으로 가만히 수온을 가늠하고 발목과 허벅지를 거쳐 가슴·등짝을 물에 담글 때 포근히 감싸오는 물의 촉감은 아득하고, 물 속에서 샘솟는 나른한 쾌감은 아찔하다.

‘한일 목욕문화의 교류를 찾아서’라는 부제를 단 <한국 온천 이야기>는 동래온천부터 금강산 온정까지 한반도 곳곳에서 용출하는 ‘물의 극락’을 직접 방문하면서 조선인과 왜인, 반도신민과 제국의 일등국민, 한국인과 일본인의 만남을 되짚어보는 역사 에세이다. 목욕이 ‘몸의 기억’인 까닭에, 온천에 대한 탐사보고서는 결국 ‘동아시아적 신체’를 복원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책의 첫대목 ‘한일 목욕문화의 뿌리를 찾아서’는 고려와 조선의 목욕문화에서 드러나는 천양지차를 묘사하며 시작하는데, 그때 습속의 변화를 이끈 동인은 탕 속에 들어가는 신체 위에 새겨진 ‘유교적 규율’이다. 송나라 사람 서긍에 따르면, 고려 사람들은 언제나 입을 열면 청결하지 못한 중국인들을 비웃을 만치 목욕을 즐겼다. 남녀의 구별 없이 강가에 나와 의관을 강가에 벗어놓고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는데, 이를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한다. 허나 ‘사대부의 나라’ 조선은 그런 야만적 풍속이 사라진 지 오래 라며 중국 역사서에서 삭제해줄 것을 요구하기에 이른다.

목욕의 근대적 규율은 청결과 위생

목욕풍속에서 불교적 기원을 공유한 일본에선 에도시대에 이르러 열도 곳곳에 후로(증기욕탕) 집이나 탕집들이 생겨났다. 당시 공중목욕탕은 상반신은 뜨거운 증기로 데우고 허리 아래는 뜨거운 욕조에 담그는 형태가 주류였는데, 조선의 한증과 꽤 닮은 데가 있었다. 19세기까지 나체를 개의치 않고 남녀가 혼욕하던 그네들의 입욕 풍속은 서구의 시선과 맞부딪치며 바뀌게 된다. 개항 이후 메이지 정부는 야만국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으려고 나체 습관을 금지하는 고시를 내리기에 이른다. 강화도 조약 뒤 일본식 탕집은 부산의 일본인 거류지로 상륙하는데, 1880년 일본 영사관은 나체풍습이 한국인들의 경멸을 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목욕하는 ‘동아시아적 신체’에 새겨진 근대적 규율은 위생관념의 세례를 받으며 한번 더 굴절된다. 국민에게 군인의 신체를 요구한 제국 일본은 물론이거니와, 조선에서도 ‘근대’가 우뚝 서길 꿈꿨던 유길준이 <독립신문>에 공중목욕탕 등 위생시설을 개량하자는 주장을 제기하는가 하면 손병희가 창간한 <만세보>가 많은 사람들이 목욕하는 습관을 갖고 청결에 주의를 기울일 것을 당부하는 논설을 싣기도 했다.

시모다의 공중목욕탕. 일본을 개항시킨 페리 제독의 책 <일본원정기>에 수록된 그림이다. 씻는 곳에는 쓰고 난 뜨거운 물이 흘러갈 수 있게 홈이 파여 있다. 석류구라고 불리는 욕실 입구는 증기가 빠져나가지 않도록 낮게 시공했는데, 그리로 몸을 구부리고 들어가는 손님의 모습도 보인다.

2부 ‘동래온천 이야기’는 <한강선생봉산욕행록><조선왕조실록> 등 자료에 담긴 동래온천의 옛모습과 왜인들과의 교류상을 대략 훑은 뒤, 식민통치하 일본인들이 남긴 흔적들을 꼼꼼히 추적한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인들의 동래온천 ‘진출’은 질적인 변화를 보인다. 기존의 공중목욕탕을 차용하는 형태를 벗어나, 직접 온천 경영에 나서게 된 것이다. 특히 너른 정원에 뱃놀이를 할 만한 연못을 갖춘 봉래관은 당시 <조선시보>가 ‘동양 제일의 명성이 부끄럽지 않은 대여관’이라 평했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식민통치 뒤 조선 가스 전기 주식회사가 경영하던 모든 온천사업은 1922년에 이르면 남만주철도 주식회사에서 인수하게 된다. 근대를 상징하는 철도회사가 설치한 온천·해수욕장 등의 시설에는 일본의 전통 입욕 문화와 근대적 ‘국가위생원리’를 내포한 서구 목욕문화가 포개져 있었다. 참신하고 모던한 의장이 도입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지은이는 비록 일본인이지만, 온천지의 경영을 둘러싼 토착민들의 반발을 전하며, 일제의 식민지 수탈상황도 빠뜨리지 않는다. 한국 온천들에 대한 책을 펴낸 일본인 지은이의 역사인식은 한반도 각지의 다양한 온천들을 소개하는 3부에서 그 일단을 엿볼 수 있다. 유성온천을 방문한 뒤 계룡산의 가마터를 찾아간 저자는 거기서 자신의 역할모델이라 할 두 일본인의 자취를 더듬는다. 조선의 도자기를 사랑했으며, 민예운동의 주창자이기도 했던 야나기 무네요시와 아사카와 타쿠미가 바로 그의 선배들. 카아이 학원 오사카 분교에서 현대문학 교수로 일하는 지은이는 재일동포 2세 여성을 아내로 맞은 사람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자취 더듬기도

동래온천의 허심청에서 시작된 3년간의 답사여행은 남북화해 노력의 결실로 출입구가 열린 금강산 온천의 노천탕에 몸을 담그며 마무리된다. 그는 전쟁과 침략이 끊이지 않은 동아시아 지역에서, 근대의 산물인 ‘국가’나 ‘민족’의 틀을 넘어 공감할 수 있는 지층이 분명 존재함을 목욕문화의 교류를 통해 확인하고 싶었다고 고백한다. 비교적 이른 시기에 근대국가의 기틀을 닦았고 결국 ‘제국’으로 나아간 일본에서, ‘국가’는 사람들에게 서구 근대화에서 비롯된 위생 건강 사상을 계몽했지만 일본인들은 그것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온천과 입욕의 도락을 계속했다. ‘때와 번뇌를 깨끗이 씻어내고 헹굼탕에서 다시 씻으면 누구든 다 똑같은 나체’라는 <우키요부로>의 한 구절처럼, 분명 의복을 벗어버린 탕 속에는 ‘나’라는 경직됨이 느슨해지며 한때나마 유토피아의 감촉을 느끼기 마련이다.

지은이는 한발 더 나아가 묻는다. “근대라는 시간보다 훨씬 길고 깊은 동아시아의 역사적 신체의 기억은, 근대 정치 언어로는 도달할 수 없는 지층 속에 흐르며,